「해부극장」- 한강 | Bird
해부극장
한강
한 해골이
비스듬히 비석에 기대어 서서
비석 위에 놓인 다른 해골의 이마에
손을 얹고 있다
섬세한
잔뼈들로 이루어진 손
그토록 조심스럽게
가지런히 펼쳐진 손
안구가 뚫린 텅 빈 두 눈이
안구가 뚫린 텅 빈 두 눈을 들여다본다
(우린 마주 볼 눈이 없는 걸.)
(괜찮아, 이렇게 좀더 있자.)
Nobody's watching
아무도 봐주지 않아요
Drowning in words so sweet
달콤한 말들에 빠져
Mild is the water
포근히 감싸오는 물속에
Caught as a bird once free
자유를 잃은 새처럼 갇혀버렸죠
*해부극장 - 17세기 이탈리아의 해부학자 안드레아 베살리우스의 책. 수년간의 급진적 해부 연구 끝에 뼈와 장기, 근육 등 정교한 세부를 목판에 새겨 제작했다. 독특한 구도의 해골 그림들이 실려 있다.
한강의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에 실린 해부극장이라는 시다.
해부극장을 검색하다가 재밌는 글을 발견했다.
안드레아 베살리우스의 책과 이 시의 상관관계에 대해 알 수 있다.
해부극장이라는 독특한 제목이 어떻게 생겨난건지 궁금했는데, 17세기 유럽 대학의 해부학 강의실이 원형극장식이었다고 한다. 제목에 이끌려 읽고 나면 여운이 남는 매력적인 시다. 읽으면서 장면이 그대로 상상되는 게 참 재밌었다.
기억에 남는 건 해골을 표현한 방식이다. 안구가 뚫린 텅 빈 두 눈. 개인적으로 텅 빈 눈에서 단순히 해골을 표현하는 것뿐만 아니라 공허함이 느껴졌다. 그래서 다른 해골이 '괜찮아, 이렇게 좀더 있자.'라고 했을 때 두 해골이 서로 위로받는 것처럼 느껴졌다.
때로는 자신과 같은 처지의 사람이 함께 있어주는 것만으로 위로가 될 수 있다. 눈이 없는 해골이 다른 해골의 눈을 들여다 본 이유는 무엇일까? 중요한 건 눈을 마주본다는 행위다.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태도. 상대방의 처지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만으로도 의지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