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오면 우리는 | 정보라
기계의 순리를 믿으라
인공태양 실험이 성공함과 동시에, 지배자의 손가락 하나로 행성이 멸망할 위기에 처한 세상. 이에 행성을 보다 합리적으로 보호하기 위해 편견이 없고 공정한 기계가 행성의 미래를 결정하게 한다. 이것이 바로 '안전장치'다. 안전장치는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가 안전하게 공존하고 상생하기 위한 체계를 구축하기 위해 개발됐다. 이 과정에서 로봇은 인류의 생존이 곧 행성의 멸망을 불러올 것이라 판단해, 인류 문명을 종말시키기로 결정한다.
21p
지구상 다른 모든 생물종을 위한 최선의 안전장치는 인류 문명의 종말이었다.
아주 잘못된 논리는 아니라고, 나는 가끔 생각했다.
로봇은 인간을 죽이기 위해 같은 인간을 세뇌시킨다. 왜냐하면 로봇은 인간을 죽이려고 설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17p
인간이 숨어서 생존할 만한 곳을 추측하고 그런 곳을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인간을 찾아내고 붙잡고 죽이는 작업은 로봇이 아니라 인간이 가장 잘할 수 있다고 마리카는 말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인간은 언제나 같은 인간을 죽이는 일에 무척 능숙했다. 다른 어떤 동물도 인간만큼 인간을 잘 죽이지 못했다.
주인공은 생존자를 찾기 위해 돌아다니다, 어느 한 수영장에서 자신이 인간이라 주장하는 로봇을 만난다.
10p
빌리에게는 생물체의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았다. 물에 젖은 옷과 머리카락에서 비린내가 났지만 그건 썩은 물 냄새였다. 빌리의 냄새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나는 처음부터 빌리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주인공은 흡혈인이기에 인간보다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있다. 빌리에게서 인간의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점, 피에서 산업폐기물 쓰레기 맛이 난다는 점에서 빌리가 인간이 아님을 알아차린다. 그렇지만 빌리는 계속해서 자신이 로봇이 아니라 사람이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그렇게 믿고 있는 것 같았다.
로봇은 인간과 비슷한 로봇을 만들어 인간을 유인하는 데 사용하곤 한다. 그렇기 때문에 주인공도 빌리의 말을 믿지 않았다. 빌리는 인조인간 제작소가 존재하고 자신은 거기서 만들어졌는데, 그곳을 파괴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인간인 마리카와 그의 일행들은 그 말을 로봇의 꼬임으로 여겼으나, 주인공은 반신반의하며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결국 빌리와 함께 인조인간 제작소를 없애기 위해 출발한다. 인간을 배신한 기계신봉자들과, 네트워크로 연결된 모든 기계를 피해 인조인간 제작소를 파괴하는 내용의 SF 아포칼립스 소설이다.
책의 감상
기계가 행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인류 문명이 종말해야 된다고 결론을 내렸다는 점이 가장 흥미로웠다. 왜냐하면 인간은 로봇이 인간을 절대 위협하지 못하도록 설계하기 때문이다. 이는 아이작 아시모프가 제시한 로봇의 3가지 원칙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제 1원칙: 로봇은 인간에게 해를 입혀서는 안 된다. 또한, 부작위로써 인간이 해를 입게 두어서도 안 된다.
제 2원칙: 제 1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한, 로봇은 인간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제 3원칙: 제 1원칙과 제 2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한, 로봇은 자기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
1원칙부터 인간에게 해를 입혀서는 안 된다는 조건을 다는 걸 보면, 인간은 과거에도 기계가 인간의 생명과 미래를 위협할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 같다. 인간이 '의도'를 가지고 만들지 않는 이상 로봇이 인간을 해칠 거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로봇이 인류의 생존을 고려하지 않고 행성의 미래만 바라본다면, 인류의 종말이 행성에 이롭다는 결론이 나올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인간은 이미 너무 많이 지구를 훼손했다. 기술의 발전에서 인간은 항상 이기적이었고 '인간'을 제외한 다른 생명체의 존속을 고려하지 않았다. 음, 고려하지 않았다기보다는, 고려하지 않은 쪽이 우세했다고 표현하는 게 맞는 것 같다.
15p
기계들의 반란은 공상과학 소설의 아주 오래된 단골 소재다. 기계들의 반란이 실제로 일어나면 옛날 소설가들은, 예를 들어 집에 있는 세탁기나 청소기가 나의 목숨을 위협할 것이라고 상상했던 것 같다. 그들은 틀렸다. 인간에게 가장 위협적인 존재는 언제나 인간이다.
그리고 작가도 딱히 기계가 인류를 지배했다고 쓴 것 같지는 않았다. 인류가 기계를 통해 인류를 '지배하도록 만들었다'고 표현한 것 같았다. 안전장치를 만들었던 처음의 의도와 다르게 말이다. 그리고 소설에서도 항상 인간을 위협하는 건 같은 인간이라는 걸 나타냈다. 인간의 배신자인 '기계신봉자'들을 통해서.
15p
"적자생존, 약육강식, 자연의 순리에 따르라."
로봇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굴종과 순리를 언제나 혼동했다.
개인적으로 나는 약육강식, 자연의 순리라는 말을 정말 싫어한다. 인간은 지성체다. 시작은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지배하도록 태어났을지는 몰라도, 우리는 학습을 통해 약자를 보호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배웠다. 우리가 약육강식의 법칙을 따를거면 생존만 신경쓰면 될텐데 그럼 공부는 왜 하고 꿈은 왜 꾸는가? 약육강식이 정말 인류 발전에 도움이 되는 걸까?
이처럼 생존이 위협되는 세상에서 강한 자에 붙어 목숨을 연명하는 기계신봉자들이 인간을 위협하고, 흡혈인은 이런 기계신봉자의 피를 빨며 인간과 공존하는 흥미로운 공생관계가 유지된다.
40-41p
통신기기만이 아니고 사람들은 대체로 기계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거리와 건물에 감시카메라가 달려 있고 차량의 주행기록장치와 전화에 탑재된 저장장치와 추적장치, 기록장치들이 모든 사람들의 모든 움직임과 모든 말과 행동을 전부 관찰하고 기록하고 감시하는데도 사람들은 그런 정보가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 활용될 것이라 여겼다. 그리고 그렇지 않을 경우에도 자신을 보호해주는 사람들에게 신고하면 모든 것을 바라보고 기록하는 기계와 그 기계를 악의적으로 사용하는 인간을 막을 수 있다고 많은 사람들이 진심으로 믿었다.
기계가 인간을 잡아 죽이는 이쪽 세상에선 상상도 못할 기계 착취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 또한 우리를 둘러싼 수많은 기계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기계 없이는 살아가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다. 우리 주위의 기계들이 전부 우리를 감시하게 된다면 얼마나 끔찍할까.
64p
"당신은 당신이 인간인 걸 어떻게 알아요?"
65p
"한때는 인간이었잖아요. 그때는 당신이 인간인 걸 어떻게 알았냐고요?"
당신은 당신이 왜 인간인지 고민해본 적 있는가? 난 없다. 인간처럼 생겼으니까 인간이지. 우리 세계에서는 진짜 인간과 가짜 인간을 구별해야 할만큼 우리의 존재를 위협하는 것이 없었다. 아직까진 말이다.
빌리는 기계로 태어났지만 본인이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처럼 생각하고, 인간을 위해 행동하고, 인간처럼 울고 말하고 소통한다.
12p
"나, 사람이에요······. 로봇 아니에요······."
13p
나는 손의 힘을 뺐다. 우는 로봇은 처음 봤다.
빌리는 왜 자신이 인간이라고 생각했을까? 인간이 왜 인간인지도 모르면서 어떻게 자기가 인간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을까? 인간의 본질이 무엇인지 계속해서 고민하게 됐다.
83p
나는 빌리가 질문했던 인간의 조건을 생각했다. 상황에 맞는 적절한 액체가 몸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인간의 조건인지도 모른다. 눈물, 땀, 피, 혹은 진물이나 오물.
96-97p
"애도하는 것이 인간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어딘가의 자료에 적혀 있었어요."
"그 자료는 틀렸어."
"코끼리하고 고래도 죽은 동료를 애도해."
그리고 코끼리나 고래는 동료를 의도적으로 죽음으로 몰고 가지 않는다. 동료의 죽음에서 이득을 취하지도 않는다. 코끼리와 고래가 인간보다 윤리적으로 훨씬 더 우월하다.
주인공은 원래 인간이었다가 흡혈인이 됐는데, 흡혈인은 인간보다 강하지만 햇빛을 보면 타죽는다. 흡혈귀가 아니라 흡혈'인'이라고 칭하는 것도 신선했다. 이 책의 흡혈인은 어떤 종족보다는 좀 더 '인간'에 가깝긴 하다.
46p
나중에 흑인 배우가 흡혈귀와 인간 사이의 혼혈이라는 설정으로 주인공 역할을 맡기도 했지만 동양인 흡혈귀는 본 기억이 없다.
47p
그런 영화에서 뱀파이어들은 하늘을 날 수 없었고 혼자 힘으로 군단을 쳐부수는 뛰어난 무술 실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장애인 뱀파이어는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았다.
흡혈인이 된다고 외모가 변하는 것도 아니고, 힘이 좀 세지지만 그렇다고 또 특출나게 센 것도 아니다. 게다가 팔이나 다리가 잘리면 다시 재생하지 않아 탈출하다가 팔다리를 잃은 흡혈인도 많다. 인간과의 확연한 차이점은 생명 반응이다. 흡혈인은 피를 빨지 않으면 굶주리긴 하지만 죽지는 않는다. 체온도 없고 눈물도 흘리지 않는다.
주인공은 인간이었기 때문에 태양을 그리워하는 모습도 보인다. 언젠가 죽음을 맞는다면 태양에 타죽을 것이라 결심한다. 그렇지만 햇빛을 쐬면 죽기 때문에 겨울을 갈망하는 모습이 자주 나온다. 보통 생명이 시작되는 봄을 주로 갈망하는데, 밤이 길어지는 겨울을 희망으로 표현한다는 점이 색다르고 아름다웠다.
42p
겨울이 오면 좋겠다고, 나는 또다시 생각한다. 춥고 고요하고 긴 겨울밤이 빨리 오면 좋겠다고 나는 마음속으로 열망한다.
99p
짙은 남빛 밤하늘은 매끈하고 투명했다. 겨울밤의 하늘 같다고, 나는 생각했다. 저 고요하고 진한 어둠이 오래도록 이어졌으면······.
기계로 태어나 인간으로 죽은 존재가 있었다.
많은 주제가 담겨 있었지만 결국 인간의 본질은 무엇인가가 이 책의 중요한 물음이었던 것 같다. 무엇으로 죽을 것인가.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태어날 지는 결정할 수 없지만 어떤 모습으로 죽을지는 결정할 수 있다. 죽음의 의미를 스스로 선택하는 것, 되고자 하는 나로서 죽는 것. 그것에 대해 고민하도록 만들었다. 인간다움을 잃지 않고 계속해서 살아가면, 언젠가 인간으로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