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지는 곳으로 - 최진영

cikat 2024. 8. 29. 21:21

오늘은 어제와 다른 곳에서, 내일은 오늘과 다른 곳에서 지는 해를 보는 것.

 

 

 알 수 없는 바이러스로 많은 사람들이 죽는 절망의 세계. 

 도리는 바이러스로 부모님을 잃고 어린 동생과 함께 세상을 떠돌아다니며 생존하고 있다. 금보다 귀한 티켓을 훔치고, 통조림을 먹으며 힘겹게 도시를 이동한다. 언젠가 올 봄을 기다리며.

 

죽는 순간 나는 미소에게 무슨 부탁을 할 수 있을까. 사랑해. 사랑을 부탁할 것이다.
- 17p

 

잠을 자지 않아도 해가 떴다. 숨을 쉴 수 없는데 죽지 않았다. 울지 않는데도 눈물이 흘렀다.
- 35p

 

 가족을 여의고 세상이 불행과 절망으로 차오르는 와중에도 시간은 흐르고 자신은 살아 있다는 것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어린 동생을 살려야 한다는 책임감이 도리를 살아 있게 만든다. 한 번에 들이닥친 불행에도 가까스로 정신을 붙잡게 한다.

 

난 언니를 혼자 두지 않아.
언니는 날 혼자 두지 않아.
언니가 잠에서 깨면 약속할 거야.
사랑한다고 약속할 거야.
- 156p

 

 

 미소는 어린 자신이 언니를 지키지 못하는 것에 대해 답답함과 미안함을 느낀다. 도리는 미소를 지키기 위해 세상의 잔인함을 배우고 자랐지만, 미소는 아직 순수함을 잃지 않으며 도리를 지켜 줄 새로운 가족을 원한다. 

 

 밤을 보내기 위해 들어간 빈 집에서 도리와 미소는 지나 가족을 만나게 된다. 탑차를 타고 다니며 가족과 친척, 이웃인 건지와 함께 이동하는 무리다. 도리를 안타깝게 여긴 지나는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도리 자매를 차에 태운다. 어른들은 하나같이 삭막하고 비정한 짓을 저지르며 멸망하는 시대에 알맞게 변질되고 있지만, 지나만큼은 인간성을 잃지 않은 유일한 인간이다. 도리는 지나를 보며 자신이 잊고 있었던 인간으로서의 소중한 것들을 바라게 된다. 

 

황량하게 얼어붙은 대지 위에서 끝도 없는 길 위에서, 불행과 절망에 지친 사람들 틈에서 나는 바로 그런 것을 원하고 있었다. 먹을 수도 입을 수도 없지만 나를 좀 더 나답게 만드는 것. 모두가 한심하다고 혀를 내두르지만 내겐 꼭 필요한 농담과 웃음 같은 것.
- 43p

 

지나가 무언가를 먹는 모습을 보면 한가로운 주말의 단출한 저녁 식탁이 떠올랐다. 타고난 여유였다. 야릇한 여유였다. 지옥에 떨어지더라도 자기만의 품위를 지킬 사람. 그래서 지금 더 괴로울 수 있겠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지옥에서라도 수백 번 죽는 게 나은 사람.
-54p

 

 총과 칼로 식량을 얻기 위해 싸우는 세상에서 그 누가 립스틱을 받았다고 순수하게 기뻐할 수 있을까. 지나는 희망을 잃지 않고, 품위를 잃지 않고, 절망의 땅에서 명예롭게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비록 무기가 없는 사람을 죽이는 아빠를 말리지는 못하지만, 자신을 사랑하는 가족을 미처 버리지 못하지만, 연약하고 동정심이 많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강해질 수 있는 사람이다.

 

불행이 바라는 건 내가 나를 홀대하는 거야. 내가 나를 하찮게 여기고 망가트리는 거지. 난 절대 이 재앙을 닮아 가진 않을 거야. 재앙이 원하는 대로 살진 않을 거야.
-55p

 

 도리와 지나는 생존에는 필요 없는 로맨틱한 선물을 주고 받으며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도리가 지나의 친척에게 강간을 당하고, 그로 인해 도리가 친척을 죽이게 되자 도리는 지나 가족에게서 도망친다. 지나는 가족에게 실망하고 충격을 받지만 도리와 함께 도망치지는 않는다. 그러나 도리를 해치지 않을 거라고 믿었던 가족에게 배신감을 느끼고, 도리를 향했던 원망과 비난이 언젠가는 자신을 향할 수 있다는 의심을 갖게 된다.

 

 

 류는 단과 결혼하여 맞벌이 가정으로 해림과 해민을 키우는 여자다. 바이러스로 해림을 잃고 단과 해민과 함께 차를 타며 생존해나간다. 

 

 사실 류는 돈을 버느라 자식에게 애정을 많이 주지 못하는 부모였다.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 애정 어린 손길 하나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이해하지는 못하며, 그런 것보다 아이들이 다른 아이와 비교당하지 않게 키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멸망이 도래한 다음에야 사랑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 사느라 바빠서 사랑하지 못했다는 변명을 품고.

 

중요한 일을 다음으로 미루거나 대충 처리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가족 여행, 가족사진, 생일 파티, 칭찬과 위로, 오늘은 어땠어? 키가 이만큼이나 컸네, 안아주고 사랑한다 말하는 것, 오늘을 기억하고 내일을 기대하는 것, 가만히 들여다보는 것, 잘 자라고 말해 주는 것.
- 89p

 

 매년 돌아오는 생일, 가족여행, 사진, 별 거 아닌 거 같아 보이는 사소한 일처럼 보이지만 이런 자그마한 순간들이 모여 우리를 구성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부모에게 받은 사랑이 어떤 거창한 선물이나 좋은 집 같은 게 아닌, 날 안아주고 사랑한다고 말하는 순간임을 기억한다. 학예회를 보러 오는 것, 아플 때 간호해 주는 것, 가족과 함께 한 생일파티, 여행, 그런 모든 순간들이 모여 나를 구성하고 세상을 살아 갈 힘을 준다.

 

이렇게 만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살아 있다면.
살아만 있다면.
- 158p

 

우리의 기적. 그런 것이 아직 남아 있을까. 평생에 단 한 사람은 있을 것이다. 내 인생의 A, B, C가 아니라 완벽한 고유명사로 기억될 사람이. 어떤 이는 지름길로 나타나 순식간에 지나가 버린다. 가장 먼 길을 지난하게 지나고 모든 것에 무감해진 때에야 비로소 거기 있는 풍경처럼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사람도 있다. 기적을 만나려면 그곳까지 가야 한다. 멀어지며 그것을 갈구할 수는 없다.
- 171p

 

 

 아포칼립스 세계에서의 사랑을 다루고 있는 이 소설은 류, 도리, 지나의 시점에서 주로 쓰이고 있으나 미소와 건지의 시점으로 보는 세계도 흥미롭다. 특히 가정폭력을 겪던 건지가 바이러스로 인한 아빠의 죽음을 목격하고 방황하다가, 아비규환인 세상에서 죽은 부모를 벗어나 바다에서 살겠다는 꿈을 가지게 되는 것이 인상깊었다. 건지의 순수한 사랑도, 미소의 매듭이 없는 사랑도 전부 애틋하게 느껴지지만, 도리와 지나가 사랑으로 인해 세상을 헤쳐 나갈 힘을 얻게 되는 부분이 가장 위로가 되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까닭은 누군가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며 다시 한 번 느낀다.

 

아주 많은 이들이 남긴 사랑의 말은 고요해진 지구를 유령처럼 바람처럼 떠돌 것이다. 사랑은 남는다. 사라지고 사라져도 여기 있을 우주처럼.

 

<해가 지는 곳으로> 작가의 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