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다를 모시고, 물결을 살피고, 물고기와 해초의 상태를 살피고, 사람들이 물고기를 너무 많이 잡지는 않았는지, 물고기가 너무 적게 잡힌 건 아닌지 살피고, 바다 위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바다로 인해 죽지 않도록 도와야 한다. 너는 바다와 사람을 이어주는 무녀다.
무녀인 마리는 선대무녀가 죽은 후 섬에서 혼자 '무녀'의 역할을 감당하며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는 소녀다. 무녀의 역할은 바다에 나가는 사람들이 파도에 휩쓸려 죽지 않고 물고기를 많이 잡아오도록 바다의 신에게 청하는 일이다. 사람들은 누군가 바다에 빠져 죽으면 무녀 탓을 한다. 또 자식이나 남편이 바다에서 위험에 처하면 무녀 앞에 엎드려 빌기도 한다. 무녀란 섬에서 배척되는 존재다. 사람들은 무녀를 신격화하는듯 하면서, 마을 주민으로서는 선을 그으며 어린 소녀를 착취한다. 무녀라는 이름으로.
능력 없는 무녀는 섬에 필요가 없기에 아이를 낳아 후대를 만들길 강요당한다. 마리는 강하고 억센 사람이다. 아이를 낳지 않기 위해, 정확히는 쓸모가 없어 버려지지 않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무녀로서의 역할에 최선을 다했다. 여느 때처럼 바다에 나가 기도를 올리다가 인어를 마주친 건 그런 하루였다.
마리는 인어에게 한눈에 반했다. 금세 사라졌지만 인어가 바다에 빠져 죽을 뻔했던 마리를 구하면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마리는 인어에게 '수아'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그렇게 둘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밤마다 만나면서 사랑을 키워나간다. 매일 서로를 만지고, 이름을 부르고, 눈을 맞추면서.
사람들이 인어를 발견하면 결코 좋은 꼴을 못 볼 것이다. 마리는 철저하게 숨기려 했지만 무녀의 일은 많고 버거웠다. 자는 시간이 줄어들면서 일에 집중하지 못하자 마을 사람들이 도끼눈을 뜨고 마리를 감시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남자를 만나느라 그런 거 아니냐고 의심했지만, 마리와 인어가 만나는 모습을 누군가 목격하면서 사람들은 희귀한 인어를 잡아서 팔자고 하는 지경에 이른다.
태풍이 온 직후, 무녀는 태풍을 막아내지 못했다는 이유로, 또 반쯤은 인어와 만나 일에 집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산 제물이 될 위기에 처한다. 마리는 수아와 함께 떠나려 하지만 어머니의 유품인 옥가락지를 찾으러 가다가 사람들에게 붙잡혀 결국 불에 태워지고 만다. 마리는 수아에게 여기로 오지 말라고, 도망치라고 애타게 소리치지만 수아는 마리를 구하러 오다가 마을 사람들이 던진 작살에 맞는다. 극심한 분노를 느낀 마리는 불을 다루는 마녀가 된다.
지금도 선대 무녀가 했던 말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하지만 선대 무녀님.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그들의 됨됨이는 변하지 않습니다. 저것이 저들의 본성이라면, 왜 살려 둬야 하는 거죠? 바다 덕분에 살면서도, 바다에 대한 감사를 표하는 일은 무녀에게 미뤄 버리는 자들. 무녀의 힘이 사라질까 얼른 애를 낳으라 종용하는 자들. 자신들을 도와준 수아를 팔아먹기 위해 작살을 드는 자들인데.
감정이 격렬해질수록 불꽃이 날뛰었다. 수아를 더는 슬프게 하고 싶지 않았으나 불은 점점 커졌다. 모든 걸 잡아먹을 듯이. 이 섬을 모조리 태우지 않고서는 꺼지지 않겠다는 듯이.
여기서부터 마녀와 인어의 시간을 넘나 드는 사랑 이야기가 계속 된다. 때로는 마리가 수아를, 때로는 수아가 마리를 쫓아다니며 관계를 쌓고 사랑에 빠진다. 둘의 사랑은 가히 운명적이다. 시간을 거슬러 오기도 하고, 기억을 잃기도 하고, 하지만 마지막은 파멸에 이르는. 재와 물거품은 이야기를 관통하는 소재다. 마녀는 재가 되고, 인어는 물거품이 되고.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마리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 또 맞추며 사랑을 표현했다. 수아는 마리가 잠들기 전에 잠들고, 마리가 깬 후에야 잠에서 깼다.
···
아주 다행이었다. 내일과 내일들이 모여서 영원이 되는 걸 텐데, 왜 마리는 내일도 사랑한다는 말은 들어 주면서 영원히 사랑한다는 말은 싫어하는 걸까. 그런 의문이 들기는 했으나 수아에게는 마리가 제일 중요하고 소중했다. 불로불사의 인어는 입맞춤과 눈빛 하나하나에 자신의 생을 담고, 온 마음을 심어 영원을 노래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안타까울만큼 행복에 이르지 못한다. 꿈같은 시간을 보내고 나면 한 명이 사라져버리니, 보면서 애가 탈 지경이다. 마을 사람들은 두 사람이 행복하도록 두지 않는다. 공간도, 사고도 폐쇄적인 작은 섬에서 젊은 여성 둘이 사랑하기란 쉽지 않다. 그런 환경에서 자란 마리가 쉽사리 영원을 믿지 않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다. 둘은 목숨을 내어줄 정도로 서로를 사랑하지만, 완벽하게 신뢰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자꾸만 자신을 희생해서 상대를 살리려고 하는 게 애달프고 답답했다.
네 눈물은 바다와 연결되어 있어서 끊임없이 흐르는 걸까. 언제가 되어야 눈물이 그칠까. 수아는 달아오른 눈가로 자신을 애틋하게 바라보는 마리를 끌어안고 채 마르지 못한 눈물을 입술로 닦아 준 뒤 깊게 키스했다.
"날 사랑해?"
"사랑해요."
"영원히 사랑할 거야?"
"네. 마리만을 영원히 사랑할 거예요."
"나만? 다른 사람들은?"
"나에겐 마리뿐이에요."
"어제도 사랑한 마리, 내일도 사랑할 마리,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보는 사람이 없어도 파도가 치는 것처럼, 마리가 잠들었어도 수아는 노래하듯 사랑한다고 말했다. 사랑을 한 방울 한 방울 모아 바다를 만들고 싶었으나 그러기에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거대한 파도로 덮치듯이 한순간에 마리의 마음을 적시고 싶었다.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마리의 마음속 구멍을 메워 주고 싶었다.
"도망가라고 했잖아!"
"드디어 너에게 왔어."
"수아, 너···!"
"사랑해."
평소 바다는 짙푸른 색이지만 크고 강한 파도가 밀려오면 유화물감을 거칠게 바른 듯 두텁고 밀도 있는 하얀 물거품이 본래의 색을 모두 덮어 버린다. 지금의 바다가 그랬다. 갑자기 사람의 키를 훌쩍 넘는 파도가 밀려왔다. 불이 붙은 채 쓰러져 있는 사람도, 몸이 얼어붙어 도망가지 못한 사람도 모두 파도에 휩쓸렸다. 그러나 파도는 아무도 해치지 않고 물거품만 남긴 채 얌전히 바다로 돌아갔다.
수아가 이대로 바닷속으로 들어간다면 다시 인어의 삶을 영위할 수 있을 터였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전보다 더 찬란하고 아름다워진 꼬리로 바다를 자유롭게 유영하겠지. 그렇지만···.
"네가 없이는 싫어···."
네가 없이는 싫어.
이 책에서 가장 좋아하는 대사다.
서로에게 목숨을 바칠 정도로 사랑하는 사인데, 자신을 살리고 죽었다고 기뻐할 수 있을까. 사랑하는 사람이 없는 세계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수아가 말한 것처럼, 두 사람은 함께가 아니면 해피엔딩을 맞이할 수 없다.
책을 읽다보면 내 안에 켜켜이 쌓인 인간혐오가 치고 올라오다가, 마리와 수아가 잠깐 잠재워주고, 가끔씩 나오는 선량한 사람들에 의해 결국은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사람들이 가진 양면성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된다. 마리와 수아의 사랑을 방해하는 건 사람이지만 결국 두 사람을 이어준 것도 사람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사람들이 바라서 탄생한 존재 인어와, 사람들에게 상처 받고 인어에게 사랑에 빠진 무녀. 어찌됐건 두 사람이 영원히 행복했으면 좋겠다.
마지막은 이 대사로 마무리하고 싶다.
"세상은 다정한 사람들 덕분에 유지되고 있는 게 분명해."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사랑, 이별, 죽음에 관한 짧은 소설 | 정이현, 임솔아, 정지돈 (0) | 2024.10.11 |
|---|---|
| 해가 지는 곳으로 - 최진영 (4) | 2024.08.29 |
| 구의 증명 - 최진영 (0) | 2024.07.23 |
| 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 | 김정선 (0) | 2024.06.01 |
| 센서티브 - 남들보다 민감한 사람을 위한 섬세한 심리학 | 일자 샌드 (0) | 2024.05.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