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 습기가 차 끈적거리는 노란 장판같은 책이었다.
꿉꿉하고 또 찝찝하고, 그러면서도 오랜 시간이 지나면 추억에 잠겨 다시 펼칠 것만 같은 책.
만약에 너 때문에 내가 알코올 중독자가 된다면 너는 술병을 치우는 대신 내 술잔에 술을 따라줘야 해. 우린 그렇게라도 같이 있어야 해.
이건 사랑이 아니야.
구가 말했다.
뭐든 상관없어.
나는 단호했다.
이 책에서 표현하는 사랑이 좋았다. 사랑이라고 말하긴 했지만 사랑인지 아닌지 헷갈리는, 겉으로 보기엔 사랑과 닮아 있지만 분명 사랑보다 더 깊고 좁은, 그보다 더한 걸 표현할 길이 없어 사랑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그런 감정이 세밀하게 표현된 게 좋았다. 그리고 공감했다. 그건 분명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단순히 서로 좋아하고 질투하고 그리워하는 그런 감정보다는 더 끈적거리고 숨을 죄여오는 어떤 것으로만 느껴졌다. 서로 목숨도 내어줄 사이. 구와 담의 사이는 다른 집에서 태어난 완벽한 타인으로서 가까워질 수 있는 최대의 관계였다. 이보다 더 짙을 수가 있을까.
너와 나는 죽을 때까지 함께하겠네.
함께 있지 않더라도 함께하겠네.
그것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다만 사랑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사랑에 가까운 감정. 우리 몸에도 마음에도 그것이 들러붙어 있었고 그것은 죽어서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었다.
행복하자고 같이 있자는 게 아니야. 불행해도 괜찮으니까 같이 있자는 거지.
함께 있으면 불행할 수밖에 없지만, 불행해도 서로가 있으면 버틸 수 있는 사이.
두 사람의 삶은 기구했지만, 오히려 그랬기 때문에 서로만 바라보는 사이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을 온전히 들일 정도로 마음에 여유가 있지 않았기에, 어쩌다 들여보낸 사람은 다 떠나버렸기에.
만약 네가 먼저 죽는다면 나는 너를 먹을 거야.
청설모가 되기 위해 들어온 이곳에서, 구가 말했다.
그래야 너 없이도 죽지 않고 살 수 있을 거야.
담은 구의 시체를 먹는다. 구와 함께 한 추억을 떠올리며 그를 먹는다. 잊지 않기 위해, 함께 살아가기 위해.
책을 반쯤 읽고 나서야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게 되었다. 처음에 사람의 손톱과 머리카락을 먹었다고 했을 때는 그것이 어떤 비유인 줄만 알았다. 사람을 먹는다는 의미를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고 너무 충격이었기에 나도 모르게 그냥 먹는다는 걸로 슬픔을 표현했구나, 하고 회피했던 것 같다. 다소 혼란스러웠지만 진짜 먹은건지, 그렇다면 왜 먹을 수밖에 없었는지 궁금해서 계속 읽었다.
책을 덮고 구를 잃고 혼자 남겨진 담을 생각해봤다. 평생을 구를 기다렸고 구가 없을 때조차 구만 생각했던 삶. 담은 구를 먹지 않았다면 구를 따라 죽었을 것이다. 구를 자신의 속에 남기지 않았다면 혼자 살아갈 수 없었을 것이다. 한 때는 구였던, 지금은 차갑게 식어버린 몸뚱아리를 허무하게 불에 태워 없애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작가의 말을 읽으며 작가가 구와 담의 이야기를 쓸 때 굉장히 몰입해서 썼다는 느낌을 받았다. 구와 담은 어딘가에서 살아 있을 것만 같다. 어딘가에는 이런 사랑을, 애정을 주고 받는 사람들이 존재한다고 믿고 싶다. 이왕이면 어느 한 쪽이 죽지 않은 채로. 작가가 글을 쓰다가 지칠 때 들었다는 '창세기'란 곡에 이런 가사가 나온다.
기도해요 난 지금이 내 마지막 순간이길
그대 그 아름다운 미소 그 밖에 난 없어요
유일한 나의 세계 매일이 하루 같은 나의 꿈
이런 글을 쓰고 싶었을까? 오직 한 사람만으로 온전히 나를 채우고, 그 사람만을 바라보며 살아가고, 그렇게 살다가 죽어도 좋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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