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노래

「일찍이 나는」- 최승자

cikat 2023. 5. 12. 14:02

일찍이 나는

최승자

 

일찍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른 빵에 핀 곰팡이

벽에다 누고 또 눈 지린 오줌 자국

아직도 구더기에 뒤덮인 천 년 전에 죽은 시체.

 

아무 부모도 나를 키워 주지 않았다

쥐구멍에서 잠들고 벼룩의 간을 내먹고

아무 데서나 하염없이 죽어 가면서

일찌기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떨어지는 유성처럼 우리가

잠시 스쳐 갈 때 그러므로,

나를 안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너를모른다 나는너를모른다.

너당신그대, 행복

너, 당신, 그대, 사랑

 

내가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스쳐 지나가는 모든 인연들이 나를 전부 알 수는 없는 것처럼, 나도 사실은 나를 스쳐 지나가고 있는 게 아닐까? 자신을 완벽히 파악하지 못하면서 나는 나의 가치를 함부로 매기지 않을 것이다. 살아온 환경과 과거만으로 사람을 정의할 수는 없을테니까. '아무것도 아니었다'라는 말은, '나'를 판단하는 '나'의 시선일 뿐이다. 그러니 '나'에 의해 다시 바뀔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