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티스트
- 심규선 (Lucia)
- 앨범
- 환상소곡집 op.2 [ARIA]
- 발매일
- 1970.01.01
[심규선 - 화조도]
[가사]
격자 사이로 수양버들이 스스스스 제 몸을 떨면
밤이 늦도록 잠 못 이루는 여인은 노래에 기대어 우네
잔 꽃무늬가 가득 수 놓인 소맷부리를 동여맬 때
철없던 소녀는 내 님이 오시길 빌었다네
어찌 잊으라 하십니까 그 빛나던 한 때를
그저 다 잊으라 하면 까맣게 잊힐 줄 아십니까
나를 부르던 목소리 이제와 간 데 없고
새처럼 훨훨 날아가신 님이여
어머니의 등에 업혀서 듣던 곡절의 의미를 알겠노라
여인들이 소녀에게
꽃들이 새에게 부르던 노래
너를 사랑하지 않는 이에게 사랑을 구하지 말 지어라
어떤 사람들은 죽는 순간까지도
사랑을 몰라
안개 자락이 푸른 옥빛을 처마 위에 새기고 가면
뒷문 밖에는 잠 못 이루던 누이가 부르는 갈잎의 노래
비단 물결은 달을 따라서 세상을 두루 다니는데
누이는 어느새 한 폭의 그림이 되어 있네
어찌 잊으라 하십니까 그 짧았던 한 때를
그저 다 잊으라 하면 하얗게 잊힐 줄 아십니까
나를 만지던 손길은 이제와 간 데 없고
새처럼 훨훨 날아가신 님이여
떠난 님의 품에 안겨서 듣던 곡조의 의미를 알았노라
사내들이 소녀에게
새들이 꽃에게 부르던 노래
이미 돌아서서 가는 이에게 사랑을 부르지 말 지어라
어떤 사람들은 죽는 순간까지도
너를 사랑하지 않는 이에게 사랑을 구하지 말 지어라
어떤 사람들은 죽는 순간까지도
사랑을 몰라
심규선의 환상소곡집 op.2 [ARIA]의 2번째 곡이자 타이틀 곡인 '화조도'
환상소곡집이라는 이름답게, 가사가 한 편의 동화같다.
"너를 사랑하지 않는 이에게 사랑을 구하지 말 지어라"
이 곡에서 자주 인용되는 가사가 이 부분인데,
사실 난 그 다음 문장을 더 좋아한다.
"어떤 사람들은 죽는 순간까지도 사랑을 몰라"
죽는 순간까지도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
뭔가 동정하는 듯하면서도 체념한 듯한 이 문장이 많은 생각이 들게 했다.
가사도 노래도 좋아하지만, 이 앨범의 소개글도 꼭 읽어야한다.
나는 먼바다로 나서야 한다. 내 배가 또 한 번의 풍랑을 견뎌낼 수 있을지 가늠할 수 없다. 그리고 작은 파도를 넘기 위해 가진 모든 힘을 다 써야 한다. 바다는 늘 나에게 위협적이지만, 그래도 다시 한번 가야만 한다.
나는 여기저기 물이 새고 비명을 지르는 내 작은 배를 수리한다. 그리고 배를 녹슬고 좀먹게 하는 무지와 두려움을 부지런히 씻어낸다. 이 바다 위에서 나의 존재와 힘은 너무나 미약하고 보잘것없다. 그래서 이를 악물고, 새로운 용기를 강구해낸다.
나는 이른 새벽에 떠난다. 이 항해에서 만선을 꿈꾸기보다, 떠난 뒤 다시 돌아올 수 있을지를 먼저 생각하게 된다. 일단 바다로 나선 후에는 아무런 이정표도, 길을 물을 이도 없고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확인할 방법도 없기 때문이다. 내가 찾던 별 아래 다다르기까지 수십 번 길을 잃는다. 그 과정에서 나는 필연적으로 아주, 아주 고독해야 한다. 그리고 쉼 없이 출렁이는 파도 위에서 타는 듯이 목마른 낮과 꼬박 지새는 밤을 다 견딘다. 몇 번이고 들이닥치는 폭풍과도 싸운다. 이 모든 당연한 시간들이 지나야 고요한 대양에 다다른다. 노래를 마칠 때 무대 위에서 바라본 당신의 눈빛은 어둠 속의 별빛처럼 나에게 현현顯現한다. 그때가 오면 비로소 나는 안다. 내가 옳은 별을 바라보며 옳은 길로 왔다는 것을.
환상을 소재로 삼은 것은 현실을 도피하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였다. 나의 비참하고 절망스러운 밤을 내일로 이어 붙여 준 것은 늘 현실보다 아름다운 환상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별빛으로 자아낸 은빛 실처럼 한낮의 태양 아래에서는 드러나 보이지 않지만, 어둠 속에서 우리의 너덜너덜하고 찢어진 그물을 멋지게 꿰매 이어 놓는다. 수백수천 번 말해도 충분하지 않을 만큼 나는 또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당신의 모든 슬픔은 달래 져야만 하고, 우리는 다친 곳을 스스로 치료하지 못하기에 서로의 도움을 구해야 한다. 당신은 이미 여러 번 쓰러진 나를 씻기고 먹여주었으니 나 역시 나의 방법으로 당신을 일으킬 것이다. 당신이 아무도 없는 곳에서 남모르게 울고 사랑하는 이 앞에서는 일부러 웃음 지어 보이는 한, 내 노랫말과 노래도 계속 쓰여지고 다시 불려질 것이다. 나는 당신이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환상을 당신을 대신해 노래하려 한다. 누가 시킨 적 없지만 스스로 맡은 책임으로 여기면서. 우리의 연결은 그 자체로 놀라운 여정이고 내 삶 모두를 쏟아부어도 아깝지 않은 가치가 있다. 그리고 당신은 특별하지도 않았던 나에게, 늘 먼저 사랑한다고 말해주지 않았던가.
여기 7개의 환상을 낚은 그물을 당신 앞에 풀어놓는다. 이번 항해는 여느 때보다 혹독하였으나 어느 때보다 아름다웠고, 이 모든 과정을 겪을 수 있게 하여 준 당신에게, 보답이라 하기에는 조금 부끄러운 마음도 든다.
빛나는 은빛 비늘과, 강하고 하얀 날개같이 놀라운 재능을 가진 동료들께 매 순간 의지하였다. 함께 하는 내내 헌신적인 도움을 받았고 망망대해에서 힘을 잃었을 때 기꺼이 등 뒤의 바람이 되어주었다. 내 초라한 시를 음악으로 만들어 준 예술가들께 감사를, 열렬한 박수와 존경을 드린다. 이 모든 헌신, 수고와 눈물이 오직 당신을 향해 이루어졌다고 한다면, 온 마음으로 전부 받아줄 수 있겠는가.
"환상을 소재로 삼은 것은 현실을 도피하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였다. 나의 비참하고 절망스러운 밤을 내일로 이어 붙여 준 것은 늘 현실보다 아름다운 환상이었기 때문이다."
이 문장을 읽고 큰 충격을 받았다.
나도 힘들 때 현실도피를 자주 하는데, 특히 환상적이고 아름다운 이야기, 실현 불가능한 판타지적인 소설과 노래를 들으며 종종 현실을 벗어나곤 했다. 그리고 다시 현실로 돌아왔을 때는 우울감에 젖어 현실도피했던 나 자신을 나약하고 한심하게 여겼는데, 환상을 절망에서 벗어나기 위한 소재로 삼다니. 같은 경험을 해도 이렇게 다르게 생각할 수 있구나. 위안을 얻었다.
흔히 삶을 항해에 많이 비유하곤 한다. 망망대해에 떠 있는 배 위에서, 바람에 의지한 채 보이지도 않는 육지를 찾아 오래도록 긴 여행을 하는. 같이 일하는 동료를 바람에 비유한 것도 인상깊었다. 말을 너무 예쁘게 하셔서 내가 동료였다면 엄청 감동받았을 것 같다.
난 망망대해에 떠 있는 배를 생각하면, 왠지 모르게 그 배경에 밤하늘이 항상 있다. 앞이 잘 보이지 않는 깜깜한 밤에 혼자 배 위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그런 모습이 떠오른다.
고요한 바다에 비치는 달을 보며 바다에 들어가고 싶다고 생각하지는 않을까?
새까만 그 공간의 유일한 환상에 닿고 싶어서.
바다는 참 신기한 공간이다.
다음 곡은 이 앨범의 3번째 노래이자 또 다른 타이틀 곡인, '폭풍의 언덕'이다.
[심규선] 폭풍의 언덕: 누구도 나만큼 그대를 사랑할 순 없어요, 미워할 수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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