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노래 35

「지금 어두운 것들은」- 강은교 | The Bottom of the Deep Blue Sea

지금 어두운 것들은 강은교 버리게 하소서 지금 높은 것들은 그 높음의 살들을 지금 어두운 것들은 그 어둠의 뼈들을 지금 울고 있는 것들은 그 울음의 피들을 이기(利己)의 잠들을 탐욕의 꿈들을 그리하여 보이게 하소서 지금 부는 바람은 봄으로 가는 바람이니 지금 반짝이는 별은 홀로 하늘을 끌고 가고 있으니 보이게 하소서 어둠 속의 속의 빛 차가운 눈이 품고 있는 저 탄생들 끝내는 흐르게 하소서 처음과 끝이 하나 되어 흐르게 하소서 일어서 흐르게 하소서. [MISSIO - Bottom of the Deep Blue Sea] "I wait on you inside the bottom of the deep blue sea" - 깊고 푸른 바다 밑에서 너를 기다려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 있는 것 같은 화자가 꼭 탈출..

시와 노래 2023.01.16

「어둠 속에서」- 황인숙 | Fairy Tale

어둠 속에서 황인숙 어둠 속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서 두렵지만 그보다 더 두려운 것은 무엇을 보게 되는 것 [Seori - Fairy Tale] "Everything is repeated again and again and I'm going down" - 모든 것들은 반복되고 난 추락하고 있어 Why did I believe your love 처음엔 이 부분 때문에 사랑 노래인가 싶었는데, 대상이 애인이 아닐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사가 전반적으로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과 관련된 느낌을 받았다. 사랑하는 사람(혹은 무언가)에게 버림받아 헤매는 내용으로 해석했는데, 혼자서 어두운 길을 헤매는 장면이 떠올랐다. 이 시와 잘 어울리지 않은가? 어두운 길을 걸어가다 보인 거짓된 무언가는 사악하고 달콤한..

시와 노래 2023.01.15

「해부극장 2」- 한강

해부극장 2 한강 나에게 혀와 입술이 있다. 그걸 견디기 어려울 때가 있다. 견딜 수 없다, 내가 안녕, 이라고 말하고 어떻게 생각하세요, 라고 말하고 정말이에요, 라고 대답할 때 구불구불 휘어진 혀가 내 입천장에 매끄러운 이의 뒷면에 닿을 때 닿았다 떨어질 때 * 그러니까 내 말은, 안녕. 어떻게 생각하세요. 진심이야. 후회하고 있어. 이제는 아무것도 믿고 있지 않아. * 나에게 심장이 있다, 통증을 모르는 차가운 머리카락과 손톱들이 있다. 그걸 견디기 어려울 때가 있다 나에게 붉은 것이 있다, 라고 견디며 말한다 일 초마다 오므렸다 활짝 펼쳐지는 것, 일 초마다 한 주먹씩 더운 피를 뿜어내는 것이 있다 * 수년 전 접질렸던 발목에 새로 염증이 생겨 걸음마다 조용히 불탈 때가 있다 그보다 오래전 교통사..

시와 노래 2022.11.23

「회복기의 노래」- 한강 | 촛농의 노래

회복기의 노래 한강 이제 살아가는 일은 무엇일까 물으며 누워 있을 때 얼굴에 햇빛이 내렸다 빛이 지나갈 때까지 눈을 감고 있었다 가만히 [심규선 - 촛농의 노래] 심규선 - 촛농의 노래 "사람의 마음은 촛농처럼 가장 뜨거울 때 녹아지기 때문에" 눈을 떴을 때 창문 틈으로 새어나오는 아침 햇살을 좋아한다. 빛은 어두운 세상의 길잡이가 되고, 삶의 지표가 된다. 밝은 햇살이 비치는 거리를 걷다 보면 우울한 마음이 녹아 내린다. 이렇게 아름다운 세상을 살고 있었구나, 생각에 잠기며.

시와 노래 2022.11.23

「눈사람 자살 사건」- 최승호 | Cursive

눈사람 자살 사건 최승호 그날 눈사람은 텅 빈 욕조에 누워 있었다. 뜨거운 물을 틀기 전에 그는 더 살아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더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자살의 이유가 될 수는 없었으며 죽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사는 이유 또한 될 수 없었다. 죽어야 할 이유도 없었고 더 살아야 할 이유도 없었다. 아무런 이유 없이 텅 빈 욕조에 혼자 누워 있을 때 뜨거운 물과 찬물 중에서 어떤 물을 틀어야 하는 것일까. 눈사람은 그 결과는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뜨거운 물에는 빨리 녹고 찬물에는 좀 천천히 녹겠지만 녹아 사라진다는 점에서는 다를 게 없었다. 나는 따뜻한 물에 녹고 싶다. 오랫동안 너무 춥게만 살지 않았는가. 눈사람은 온수를 틀고 자신의 몸이 점점 녹아 물이 되는 것..

시와 노래 2022.11.19

「놓았거나 놓쳤거나」- 천양희

놓았거나 놓쳤거나 천양희 내가 속해 있는 대낮의 시간 한밤의 시간보다 어두울 때가 있다 어떤 날은 어안이 벙벙한 어처구니가 되고 어떤 날은 너무 많은 나를 삼켜 배부를 때도 있다 나는 때때로 편재해 있고 나는 때때로 부재해 있다 세상에 확실한 무엇이 있다고 믿는 것만큼 확실한 오류는 없다고 생각한 지 오래다 불꽃도 타오를 때 불의 꽃이라서 지나가는 빗소리에 깨는 일이 잦다 고독이란 비를 바라보며 씹는 생각인가 결혼에 실패한 것이 아니라 이혼에 성공한 것이라던 어느 여성 작가의 당당한 말이 좋은 비는 때를 알고 내린다고 내게 중얼거린다 삶은 고질병이 아니라 고칠병이란 생각이 든다 절대로 잘못한 적 없는 사람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람뿐이다 물에도 결이 있고 침묵에도 파문이 있다는 걸 미리 알았더라면 사람..

시와 노래 2022.05.23

「해부극장」- 한강 | Bird

해부극장 한강 한 해골이 비스듬히 비석에 기대어 서서 비석 위에 놓인 다른 해골의 이마에 손을 얹고 있다 섬세한 잔뼈들로 이루어진 손 그토록 조심스럽게 가지런히 펼쳐진 손 안구가 뚫린 텅 빈 두 눈이 안구가 뚫린 텅 빈 두 눈을 들여다본다 (우린 마주 볼 눈이 없는 걸.) (괜찮아, 이렇게 좀더 있자.) Billie Marten - Bird Nobody's watching 아무도 봐주지 않아요 Drowning in words so sweet 달콤한 말들에 빠져 Mild is the water 포근히 감싸오는 물속에 Caught as a bird once free 자유를 잃은 새처럼 갇혀버렸죠 *해부극장 - 17세기 이탈리아의 해부학자 안드레아 베살리우스의 책. 수년간의 급진적 해부 연구 끝에 뼈와 장기,..

시와 노래 2021.11.17